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간 나오토 (문단 편집) === 총리 시절 === [[파일:external/www.kantei.go.jp/souri94.jpg]] 간 나오토 총리재임 시기는 도호쿠 대지진,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. 도쿄공업대학을 졸업했으며[* [[동경일공]](東京一工) 중 하나로 [[도쿄대학]], [[교토대학]], [[히토쓰바시대학]]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의 최상위 대학이다. 그러나 이공계에 특화된 교육기관으로 정치계와는 좀 거리가 있는 편이다. 우리나라로 치면 [[포항공대]] 또는 [[카이스트]] 출신의 정치가인 셈.], 세습 정치인 집안도 아닌 평범한 공장장 출신이다. 2010년 [[일본 참의원]] 선거를 앞두고 소비세 인상 발언으로 [[팀킬]]을 저지르면서 정치적 능력에는 의문부호가 붙고 있지만, 일단 역대 총리 사상 최소 재산세 신고에서 알수 있듯 청렴성이나 도덕성 면에서는 일본 내에서도 평가받고 있었는데 [[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|도호쿠 대지진]] 하루 전에 [[재일 한국-조선인|재일교포]]에게 정치헌금을 받았던 사실이 나타났고 본인 역시 인정했다. 액수 자체도 크지 않고 헌금 자체는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문제는 재일교포가 외국인으로 명시된 일본에선 재일교포의 정치헌금은 불법이라는 것이다.[* [[마에하라 세이지]] 전 외무대신의 경우에도 같은 이유로 외무대신 직에서 자진 사퇴했다.] 간 총리의 도덕성에 흠집이 났다. 2010년 9월 이후 엔고 현상으로 인해 [[일본/경제|일본 경제]]가 위기국면으로 치달은 데다 [[참의원(일본)|일본 참의원]] 선거 참패라는 이중고로 총리직 유지가 위태로웠다.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는 발언을 '선거 전에' 하는 병크를 저지르기도 했다. 그러나 9월 14일 민주당 대표선거 결과에서는 오자와 전 간사장을 여유 있는 표차(721 대 491)로 제치고 재선되었다. 이는 오자와 전 간사장의 이미지가 (정치적 수완과는 별개로) 워낙 좋지 못하기 때문에 덕을 본 면도 있다. 간 나오토의 지지도가 떨어지는 와중에 상대편에 오자와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지지율이 상승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. 사실 당심에선 패배했지만 민심에선 크게 지지를 받았다. 그러나 총리 임기를 연장하자마자 [[중국]]과 [[센카쿠 열도]] 문제로 충돌하다가 꼬리를 내리게 되었다.[* 물론 대신 센카쿠에 함대를 대폭 보낸다. 항목 참조.] 게다가 [[TPP]]([[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]])가입을 하려 하다 일본 농민들의 강력한 반발로 입장을 철회했으며 [[조선학교]] 무상화 검토로 보수 의원들에게 까였다. 그리고 [[2011년]] [[러시아]] 드미트리 메드메데프 대통령의 러시아(및 [[소련]]) 정상으로는 사상 첫 [[쿠릴 열도|북방 4도]] 방문으로 인한 일본 외교의 무사안일함, [[북한]]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한 늦장대응, [[한반도]] 유사시 [[자위대]]의 파병이 가능한 듯한 뉘앙스의 발언 문제 등 여러 모로 비판을 받았다. 더욱이 관료제를 폐지하자고 공언했을 정도로 반 관료주의자였던 사람이 돌변해서 관료들이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사실상 다시 부활시키고 아시아 중시 외교 정책도 친미정책으로 돌아가는등 여러모로 정권교체 때 민주당이 내세웠던 공약들이 상당 부분 후퇴해버렸다. 근데 사실 [[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|도호쿠 대지진]] 등의 사태와 현실적인 국정 운영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던 측면도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